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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한번 빛을 받아서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히브리서 6장)




한번 빛을 받아서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을 나누어 받고, 또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장차 올 세상의 권능을 맛본 사람들이 타락하면, 그들을 새롭게 해서 회개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금 십자가에 못박고 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땅이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농사짓는 사람에게 유익한 농작물을 내 주면, 그 땅은 하나님께로부터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면, 그 땅은 쓸모가 없어지고, 저주를 받아서 마침내는 불에 타고 말 것입니다.

히브리서 6:4-8

신약에서 가장 난해구절이라고 하는 히브리서6장 4-8절 말씀입니다. 매우 심각한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일차적인 의미는 이렇습니다. 예수를 믿고서 ‘배교’apostasy 하면 더 큰 저주를 받는다. 배교라고 해서 단순히 다른 종교로 ‘갈아타는’ 행위만 의미하기 보다는 회개하지 않는 것과 믿음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않는 것 까지 포함합니다(히6:1). 농부에게 있어 유익한 농작물을 내지 않는 것이지요.

배교는 회개하지 않고, 합당한 열매를 내지 못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것으로 연결됩니다. 다소 흑백논리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면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것이다. 하지만, 작게나마 농작물을 심어보신 분들이라면 잘 아실겁니다. 하루라도 땅을 관리하지 않으면 농작물은 잘 자라지 않고, 온 땅이 잡초 투성이가 된다는 것을. 지금 제 눈앞 작은 텃밭에도 제 게으름에 비례하는 가시덤불과 엉겅퀴인 잡초가 가득합니다. 물론 가시덤불과 엉겅퀴는 상징적인 것이겠지요.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삶. 삶에서 공의를 행하지 못하고, 남에게 자비를 배풀지 못하고,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모든 행위가 가시덤불과 엉겅퀴겠지요.

가시덤불과 엉겅퀴는 구약 창세기에 처음으로 등장합니다 (창3:17-18). 사탄 뱀의 꾀임에 넘어간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아담에게도 주어서 둘은 눈이 밝아집니다.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진다는 뱀의 말에 넘어간 것이지요. 아마도 둘은 하나님을 사랑하면서도 하나님의 자리에 않고 싶었나봅니다. 이를 하나님이 가장 괴씸하게 여겼지요. 이 선악과 사건으로 하와는 출산의 고통을 아담은 가시덤불과 엉겅퀴가 가득한 땅을 경작해서 먹고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됩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믿었다가 배교해서 더 큰 저주를 받는다.”의 명제는 쉽게 납득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먼저, ‘그들의 처음 믿은 행위는 100% 진정한 것이 아니었다.’ 많은 분들이 이 말에 동감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원래 믿는 사람들이 아닌데, 어떻게 믿음의 모양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믿음이 원래 진실한 것이 아니라는 것으로 판명된 것 뿐이다. 기독교에서 돌아선 사람들에 대한 믿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비판논리입니다. 그들은 원래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이 아니었다고 봅니다.

그게 아니면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그 당시 100% 순수했지만, 그 사랑이 식었고 변했다는 것입니다. “순수한 사랑은 있어도, 영원한 사랑은 없다”는 죽고 못살아서 결혼한 남녀가 이혼할 때 부르는 노래입니다. 사랑은 완전하지만, 사람이 완전하지 못해서 그 사랑을 지켜내지 못합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을 때 우리는 눈물 콧물 다 흘리지만 우리의 못된 옛 습성과 죄성이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사랑을 빼앗아 갑니다. 저는 이 두번 째 의견에 더 마음이 갑니다. 물론 신학에 근거한 의견이 아니라 일반 성도의 의견일 뿐입니다.

민수기에 보이는 (민14:1-4)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 딱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절절한 사랑을 경험한 그들입니다. 애굽에 임한 하나님의 재앙을 직접 목격한 그들입니다. 자신들의 장자들만 살아남은 기막힌 일도 겪었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도 보았습니다. 우리가 이런 경험을 한다면 우리는 평생 우리의 믿음을 지킬거야...라고 쉽게 말도 합니다. 하지만, 막상 광야에 발을 들여놓은 그들은 고기가 없다고 불평합니다. 종노릇을 하던 애굽생활이 그립다는 말까지 나옵니다. 모세를 원망하고 급기야 하나님마저 원망하는 자리에 섭니다. 처음 사랑은 있었으나 그 사랑은 오래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배교는 금송아아지 신상 사건에서 정점을 찍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십계를 받고 돌아온 모세 앞에 금송아지 신상을 부어 만들고 온갖 난잡한 파티를 열어버립니다. 아론까지도 이를 방조 내지는 조장한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인 단비를 얻고도 유익한 농작물은 커녕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어버린 그들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가 날아든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고보면 사람은 쉽게 바뀌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우리를 바꾸게 (transform) 할 뿐입니다.

하나님, 오늘 하루를 또 살아갑니다. 삶이 녹록하지 않습니다. 모순 투성이에 게으르고 믿음도 부족한 사람이 바로 저 입니다. 그럼에도 참아주시고 이렇게 귀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주신 말씀으로 살아내게 하여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