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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이 자녀들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이 자녀들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들이기에, 그도 역시 피와 살을 가지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죽음을 겪으시고서, 죽음의 세력을 쥐고 있는 자 곧 악마를 멸하시고, 또 일생 동안 죽음의 공포 때문에 종노릇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Since the children have flesh and blood, he too shared in their humanity so that by his death he might destroy him who holds the power of death--that is, the devil--and free those who all their lives were held in slavery by their fear of death.

히브리서 2장:14-15

죽음의 공포만한 두려움이 우리 인간에게 있을까? 두려움과 번뇌, 고민, 갈등, 시기심, 증오... 대부분의 악한 감정들의 근원을 따지고 올라가다보면 “죽음”이라는 두 글자가 선연하게 나타난다. 돈과 명예를 추구하는 하는 것도 결국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출발한다. 죽음을 피할 수 있을 요량으로, 나를 지켜줄 만한 무언가를 찾는 것...

- 회사에서 갈등하는 것은 밥그릇을 싸움하는 것인데 내 밥그릇을 잃어버리는 나와 내 가족이 길거리에 나앉게 되고 나는 죽는다.
- 이 연구가 잘 풀리지 않아서 NIH프로포절이 실패하면 나는 사람을 잃고 펀드도 잃고 학생도 잃고 사람들의 인정도 잃는다. 직장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럼 나는 죽는다.
- 사람들이 나에 대해 험담을 한다. 사실은 아닌데. 사람들은 사실이라고 믿을 것이고 나는 그들로부터 고립되고 내가 설 자리는 없다. 혼자서 살다가, 나는 죽는다.

다소 과장된 결론이고 일반화이지만, 우리의(나의) 내면 깊숙한 곳을 들여다 보시라. 죽음에 대한 공포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다. 내 안에 이 공포가 나의 생각과 행동을 이끄는 것 역시 당연한 흐름이다.

다.행.히. 성경은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인간의 죽음에 대한 공포를 없애기 위해 오셨다. 정확히 말하자면, 죽음의 공포로 인간을 쥐락펴락하는 사탄을 멸하러 이 땅에 오셨다. 이 사탄에게 종노릇하는 인간을 자유케 하시려고 우리엑 오셨다.

“사탄”이라고 말을 하면 영화 엑소시스트같이 믿기 어려운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하기 쉽니다. 믿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사탄은 있다! 이 나쁜 영이 우리를 갖고 놀 때는 부지기수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C.S. 루이스의 스크류테잎 편지(Screwtape Letters)를 잃어 보면 사탄이 인간을 어떻게 갖고 노는지 잘 알 수 있다. 나중에 포스팅을 하겠다. 물론 이 책은 소설이다.

다시 본론을 돌아가서, 예수님은 감사하게도 (우리에게 죽음의 공포를 심어주는) 사탄에 묶인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이를 믿기만 하면 된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된다. 믿기만 하면 ‘죽음의 사탄’에게서 놓임을 받는다. 물론 세상에 살면서 육신이 죽을 때까지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만 믿는 자들은 죽음의 공포를 이미 이긴 사람들이다.

겁쟁이에서 담대함을 얻은 내가 바로,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