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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먹놀잠



예비 아빠가 되면서 내 읽을 거리도 풍성해졌다. 마흔을 훌쩍 나이에 첫 아이를 가졌으니, 궁금한 것도 많고 걱정도 생긴다.

육아 책 중에서 내 눈을 사로잡는 것은 단연 먹.놀.잠.의 개념이다. 아이는 먹고, 놀며, 자는 세가지 행동 패턴을 보이는데, 한 가지라도 건너뛰면 안되는 거다. 가령, 먹었으면 놀아야지 잠부터 자면 안된다.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는 것이 건강하고 행복한 아이로 키우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이 먹놀잠의 행동패턴이 과연 아가들에게만 적용될까? 어른들에게는 적용할 수는 없을까? 잘먹고, 잘놀고, 잘 자야지 건강한 어른이 되는 것일텐데, 치열한 경쟁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어른들의 삶은 일하기가 먹놀잠의 대부분의 패턴을 잠식해버린 모양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가기 싫은 직장에 서둘러 가야한다. 하루 종일 직장에서 버티고 버틴다. 저녁 먹기 전에 집에 들어가면 그나마 다행이다. 집에 돌아가면 긴장이 풀려서인지 손하나 까딱하기 싫다. 내일 직장에 나갈 생각을 하니 한 숨이 나온다.

좀 뜬금없지만, 먹놀잠에서 “놀”을 “일”로,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그렇게 하기싫은 “일”을 “놀”로 치환하면 어떨까? 먹놀잠=먹일잠. 즉, 놀듯이 일하고, 일해도 놀듯이 즐거운 삶. 이 시점에서 독자들의 의심과 의구의 눈초리가 마구 느껴진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을 이기는 사람은 즐기면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군대에 입대할 때 가장 많이 들었던 소리가.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였다. 군대를 다녀온 예비역들은 모두 알고들 계시리라.

일을 놀이처럼 하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내 생각에는,
1. 먼저 일터를 놀이터처럼 만들어야 한다. “바닷가 작업실에서는 전혀 다른 시간이 흐른다”를 쓴 김정운 선생이 항상 주장하는 것이, “한국 남성들의 비극은 그들만의 공간의 부재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나만의 공간이 직장에도 집에도 없으니 한 평도 안되는 자신의 차라는 공간에 목숨을 건다. 내 앞을 끼어드는 사람은 용납할 수 없다. 내 일터를 혹은 집에서 나의 공간을 ‘나만의 공간’으로 꾸미자. 일을 마무리할 때 아무일도 없었던양 정리한다. 어제 놀던 놀이를 내일도 이어서 할만큼 우리의 인내심은 그다지 좋지 않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하면, 오늘 놀 “아이템”을 정하고 한바탕 신명나게 놀아보자.

2. 그리고 마음 가짐 역시 중요하다. 목숨걸고 노는 아이를 본 적이 없다. 소꿉놀이가 싫증나면 블럭놀이를 하면된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나와 맞지 않다면 떠나도 된다’는 “생각”으로, 물론 생각이다, 의식적으로 최대한 가볍게 일을 한다. 일을 대충한다는 말은 아니고, “나같은 인재를 알아주는 이 회사에 내가 좀 기여를 해준다”는 마음 가짐으로 성심을 다해 일한다. 요점을 언제든 버리고 떠날 수 있다는 마음 가짐을 갖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그렇게 되기는 쉽지 않다. 아이들도 자라고, 집에 돈 들어갈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너무 이상적으로 들리겠지만, 우리의 욕심을 조금만 내려놓으면 빚을 지고 살 일은 적어지고 언제든 버리고 떠날 수 있다. 물가가 비싼 서울 살이가 팍팍하다면, 시골에 내려간다. 새 차를 구입하기 이전에 새 집을 구입하기 이전에 내가 향후 몇 년간 빚의 노예로 살 것인지를 먼저 생각하면 우리의 씀씀이가 그렇게 해프지는 않다. 나는 요즘에서야 철이 들었다.

3. 마지막으로, 먹놀잠=먹일잠의 각각의 패턴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먹을 때는 먹기에만 집중하고 즐기고, 놀며 일할 때는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잠을 잘 때는 잠만잔다. 굳이 직장 일을 고민하고 내일 일을 계획한답시고 (내가 그랬다) 침대 맡에서 내일 할 일을 적어내려가면 단잠은 커녕 악몽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단, 우리도 잘 알지만, 이 먹놀(/일)잠의 패턴은 항상 겹치게 마련인데, 시간을 패턴별로 분할해서 사용하면 효과적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회사를 가기전까지는 “먹”에만 집중한다. 육의 양식과 혼과 영의 양식도 채우는 시간이다. 신앙이 있다면 기도를 하고 절대자에게 기대고, 가정의 필요를 채우는 일에 게으르지 않는다. 직장에 가면 눈을 부릅뜨고 놀듯 일한다. 한국인들의 일의 생산성이 OECD국가 중 하위에 속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직장에 와서 일만하면 되는데, 괜한 정치를 하고 로비를 하고 안되는 관계를 맺다보니 생산성을 떨어지고 먹&잠에 쓸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 거다. 직장을 마치면, 잠을 청하러 집으로 향한다. 모두 다 알지만 좋은 잠을 위해서는 좋은 수면 의식이 필요하다. 가족과 함께 가벼운 산책을 하고, 게임을 하고, 기분 좋은 TV 프로그램도 시청한다. 서로에게 의지가 되는 대화는 물론 가장 중요하다. 일찍 잠을 청한다. 내일 일은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뜬다. 열심히 먹고, 놀며 일하고, 편안한 잠을 잘 수 있는 내일이 기대되지 않겠는가?

참, 이 글이 절실히 필요한 독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다.

바로 나다!